단어노트
가벼운 : 어둑해지면 빨리 집으로 향해야 할 것만 같은 쓸쓸함, 아직도 아프게 찌르는 것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복잡함, 그리고 오래 묵은 절박함의 여러 마음이 모여서 아주 가벼운 것을 만든다. 송두리째 옮길 수 있는 가벼운 몸. 지금 바로 돌아서서 다른 길을 걸어도 되는 그 만큼의 무게감.
기꺼이 : 또다시 길을 잃었다. 나는 무엇을 잃었는지 또렷이 안다. 멈출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지만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계속 걸었다. 그래서 오늘도 기꺼이 길을 잃었다. 이런 모습으로.
그녀의 말 : 어쩌면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업은 ‘자기를 잃는 대신에 자기를 보충할 언어를’ (불구의 삶, 사랑의 말, 양효실, 현실문화)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써 막고 있는 상처를 다시 덧나게 하고 텅 빈 이름을 직시해야 하고 ‘압도하는 절망과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르는 실패에도 불구하고’(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양효실, 시대의 창) 멈추지 않고, 무엇보다 당장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노트에 여러 번 써보았다.
결합 : 전시포스터가 흰색과 검정 두 가지로 한 것처럼 전시의 구성도 섬세하게 강약조절을 하였다. 전체적인 톤은 흰색과 검정, 은색과 금색, 따뜻한 빛과 차가운 빛으로, 선은 가로선과 세로선, 뾰족하게 날이 선 선과 부스스한 흐트러진 선으로 대비시켰다. 눈높이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전체에 골고루 시선이 닿도록 배치하였고 정적인 작업과는 달리 관람객의 몸을 구부려서 통과하거나 앉거나 옆으로 살짝 지나가는 등의 움직임을 유도했다. 낯선 재료의 결합으로 조각과 설치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길 바랬고, 어느 한 작품도 방문을 닫고 있지 않고 작품들끼리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를 바랬다.
꿈 : 일본어를 처음 배울 때 ‘夢を見る 꿈을 꾸다’ 라는 표현에 ‘보다’ 라는 한자를 쓰는 것이 신기했다. 보이지 않는 미래의 가능성의 세계에서 또 눈을 감고 자고 있는 상황에서 꿈을 보여지는 능동적인 것으로 표현한 것이 재미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매일 꿈을 꾸었고, 꿈때문에 잠자기를 힘들어하는 수면장애가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생각이 시각적으로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 보여지고 그려지는 지극히 시각적인 것으로 남는 불편함이 내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시각예술가로 내가 보여주는 또 드러내는 작업들이 어떨지 때로는 힘들다.
늘 저 책상 가까이 있어요 : 항상 작업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바로 손으로 합니다. 그리고 저는 작업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굉장히 짧고 주위의 상황이나 여건에 영향을 잘 받지 않고 꾸준히 어떤 방식으로든 작업을 합니다. 그렇게 많은 훈련을 한 덕분도 있고요. 늘 몸 가까이에 작업을 두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시 쓰는 : ‘나는 아이 네 명을 키우면서 주로 집에서 작업을 한다.’
이 간단한 문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사생활의 어떤 한 면으로 치부한 적도 있고, 작업활동에 방해가 될까 봐 감추려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작업의 시작이고 모든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집 안에서는 살리고 죽는 것, 작업을 하느냐 마느냐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첨예한 선택의 연속이다. 나의 물리적 제약인 동시에 무한한 상상력의 작업실이었던 집에 대한 질문들, 만족과 불안 권태와 충동 등 양가적인 감정들을 조율하며 집에서 보낸 시간과 사물들에 대한 생각들이 내 작업에 그대로 녹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주하는 내 작품은 그러한 일상을 표현 했다기보다는 오직 작업으로 일상을 덮은, 거기서 살아남은 것들이다. 여전히 내가 작업을 하고 있고, 또 어떠한 상황에서도 작업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실험이고, 사소한 저항이었다.
마디: 작년에 자른 나뭇가지에 새살이 나며 단단해지고, 내 손가락 마디도 굵어지고, 그렇게 굴곡을 넘어간다. 매끈하게 넘어가지 않는 그 마디의 두께에서 잠깐, 멈춘다.
무늬 : 기억 속의 우리집은 코바늘로 짠 도일리가 전화기 밑에 탁자 위에 소파 위에 액자 아래 밥솥 위에 익숙한 물건들 위나 아래에 놓여져 있었다. 삶아서 풀 먹인 분홍색, 엷은 하늘색, 흰색 등 여러 색깔의 레이스가 무늬로 덮개로 집의 사물들의 그림자와 함께 했다. 구멍이 난 소파나 칙칙한 이불들 서랍장 안에 들어가지 못한 갈 곳 잃은 잡동사니들을 감싸서, 그 눈에 띄는 삶의 구멍들에 아름다운 무늬로 덮어주었다.
어둑해지기전 엄마를 기다리며 레이스 구멍에 손가락을 차례로 넣어보기도 하고 구석진 곳에 매달아서 그림자를 흔들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무늬들이 있어서 나는 막연한 쓸쓸함, 오래된 눅눅함, 익숙한 외로움 들을 어린시절 기억에서 덮을 수 있었다. 한 꺼풀 아래의 무거운 공기를 덮었던 그 무늬들을 가져온다.
문장 : 나의 문제를 만드는 바깥의 시선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는 이 곳의 삶이 전부였으므로 온 몸으로 지켰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던 때에, 딸아이가 어여쁜 색깔 글씨로 완성해주었다. ‘엄마, 작업 잘해요’ 라고. 엄마와 작업을 한 문장에 넣어서 새로운 시를 짓기 시작했다.
몸 :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낮은 자세로, 덩어리와 아주 가까이 붙어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뒤늦은 몸.
맨드라미 : 안으로 들어온 바깥에 맨드라미를 단정하게 깎아서 화병에 꽂았다.
식탁 위 꽂힌 꽃의 줄기-잘린 마디-선명한 피 냄새-시골집 마당-집 마당의 맨드라미, 엄마가 말하던 ‘피가 난 곳을 맨드라미 꽃에 대면 금방 낫는단다’ -식사준비를 하다가 칼에 베인 새끼 손가락-형광등 불빛 아래 마주선 화병의 꽃-손가락에 밴드를 붙이고-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닦는다.
발끝 : 두 번째 밤, 이불 사이로 빠져나온 아이들의 발끝을 보며 모든 작업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발을 바라보면서 사랑스러운 감정으로 가득차지만, 나를 막아서는 창살과 같은 십자가도 느껴진다. 자라나는 생명의 기운도 느끼지만 고관절을 다쳐 누워 계시는 굳어가는 할머니의 발도 보인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가 스스로 서서 걸을 수 있도록 그토록 많은 손길을 다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베란다 끝에 서 있는 발끝을 여러 번 보았을 정도로 주저앉은 적도 많았다.
내가 즐겨하는 무거운 귀걸이는 나의 삶을 세우는 추가 되기를 여전히 원하지만, 주머니 속에서 나를 누르는 돌멩이가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여섯 시의 시계바늘은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가리키며 나를 재촉하고, 뾰족하게 깎아 종이에 쓰는 연필의 이야기는 이미 잊혀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나의 작업이 있다.
작업은 나의 감정을 차분히 덮고 무늬나 색감이나 촉감으로 좀더 편안한 방향으로 기억하기를 시도했던, 활짝 살아있기를 너무나 희망했던 평범한 하루에서 왔다.
발끝으로 서기 : 이 바닥은 나의 무대가 아니었다. 수많은 크고 작은 구멍들이 뚫린 바닥은 가만히 서 있기에는 불안하기만 했다. 그래서 움츠러들어 발끝을 세우게 되었다. 언젠가는 구멍속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또 적어도 이 곳과 나는 결코 같이 어우러지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어떠한 기운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잠깐이지만 면적을 최소화하며 있는 힘을 다해 발끝으로 서야했다. 발끝으로 서서 이 곳을 무사히 지나 바닥에 뿌리내릴 곳으로 한 발자국 내딛고자 했다.
맨 처음 발끝으로 서기는 낯섬과 두려움, 불안에서 나타난 변화였다. 이 곳에 온전히 딛고 서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자괴감과 내 앞의 불편한 시선과 위협에 물러서기보다는 맞서야 한다는 의지와 그럼에도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이 자연스레 이끌었다. 역설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했기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에도, 저 세계를 꿈꾸는 것도 아주 가까웠다. 그래서 이미지로서만이 아닌 훈련으로 누구나 가능한 동작용어를 받아 적은 듯하고, 선언적인 어투의 ‘발끝으로 서기’ 는 나에게 능동적인 떠남이고 낯선 시작이다.
사소한 : 그것은 수행이나 명상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어처구니없게도 반복하게 되는 네 잎 클로버찾기나 이불을 가지런히 개키고 빨래를 나란히 널고 접시를 포개는 일상의 사소한 행동들과 비슷하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리고 낮은 자세를 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세계가 있다.
네 잎 클로버나 산딸기를 따고, 조개를 캐고, 색깔 돌을 찾고, 그렇게 손 안의 보물을 찾았던 어린시절부터, 설거지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이불을 펴고 접으면서 그 거품과 주름의 너머를 상상한다.
사투리 : ‘맨든다’ 는 사투리가 있다. 나에게 요즘 뭘 맨든다고 바쁘냐고 묻는 전화 속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 어감이 아주 기분좋게 느껴졌다. 매무새를 고치고 맵시를 드러내고 매력적인 등과 같이 ‘마-‘가 아닌 ‘매-‘로 ‘맨드는’ 이 일이 뭔가 보기좋고 손길이 많이 담긴 정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 ‘문디가시나’로 자라서인지 요즘 사투리의 어감만 들어도 주머니 속에 자연스레 손을 넣는 것처럼, 먼 곳으로 발길을 향하게 된다. 어디선가 방아잎 냄새, 맨드라미 냄새가 나는 듯하다.
섬 : 선명하지만 실체가 전혀 잡히지 않는. 하루와 포개져 있지만 완전히 다른. 한 발자국만 떼어도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행동이 수반되는. 그리고 매우 가까이 있는.
설거지 : 설거지가 하기 싫어 접시를 비닐봉지에 꼼꼼히 싸서 깨뜨린 적이 있다. 파편이 집 안 구석구석 튀며 어지럽히는 것은 싫으나 그 접시는 반드시 깨야만 했다. 접시의 조각난 파편이 떠오른다. 몇 겹을 싼 비닐을 뚫고서 내 손가락을 찌르던 구석진 마음도 기억한다. 매일의 집안 청소같이 단정하게 파편은 레이스로, 조각은 빳빳하게 다려져 조용히 덮는다. 이미 일상과 작업이 작품으로 표현되기 전에 모종의 거래를 마친 것이다. 마치 짚이 황금실이 되고(룸펠슈틸츠헨) 쐐기풀이 마법의 옷이(백조왕자) 되고 나서야 사건이 해결되고 책이 완성된 것처럼.
시간 : 어렸을 때부터 괜스레 쓸쓸해지거나 마음이 힘들 때 벽지나 커튼, 이불 등 눈 앞에 보이는 무늬를 눈으로 따라가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처음에는 사물의 무늬를 눈으로 그리고 쫓아가는 듯하지만 이내 다른 세계가 펼쳐져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마치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이 양이 되고 집이 되고 큰 거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작업이 내가 응시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 집 안의 수많은 무늬처럼 오래 ‘눈을 둘 곳’으로 느껴지기를 바란다.
시 : 시를 읽는다. 고무줄을 밟아서 죽일수도 있고, 그를 사랑할 수 있고, 찌꺼기나 쓰레기를 반짝이게 만들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벗어서 드러나게 할 수 있다. 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새로운 언어 : 잠꼬대와 혼잣말이 심해졌다. 매일 꿈을 훔치는 잠꼬대는 속삭임을 넘어서 대화가 되고, 작업을 하면서 하는 혼잣말은 글로 적힌다. 그런 면에서 나는 늘 혼자가 아니었다. 밝은 곳에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당신과 함께했다.
알리바이 : 작업을 하기 위해 일상에 몸이 떠난 빈 시간을 메울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나의 든든한 조력자는 꼼꼼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작업을 할 수 있었고, 작업은 그 알리바이를 위해 조금은 몸살에 걸렸고 잠깐은 친구와 커피를 마셔야 했고 또 하루는 바다를 보러 가야하기도 했다.
어떤 : 대상의 특성, 내용, 상태, 성격 등을 뚜렷이 밝히고 싶지 않을 때, 나만 알고 싶은 수수께끼로 남기고 싶을 때 이 방법은 참 쉬웠다.
읽는 집 : 소리가 집을 깨운다.
울퉁불퉁: 출산 후 하지정맥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늘 다리가 무겁고 많이 붓는다. 오래 서있는 날이면 모든 핏줄이 바깥으로 드러나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다리를 뻗고 누울 곳을 찾아야한다.
지지대 : 그 동안 내 작업의 재료들은 플라스틱공, 끈, 망 등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개념적인 시간이 아니라 지극히 물리적인 단위로서 시간을 의미한다. 한 시간, 두 시간, 한나절, 하루, 한 계절, 일 년 등. 내 삶의 실질적인 시간이 재료로서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작업 초기 육아와 작업을 병행하며 작업의 영역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했으며, 생활과 작업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여러가지 장치나 실험이 필요했다. 가장 기본적으로 집안일을 한 균등한 시간만큼의 작업시간을 확보해 나갔고, 그 물리적 시간이 시각적으로 드러나길 바랬다. 따라서 노동력이 보이는 작업이 나타났고, 그러한 노동력을 동반한 행위는 숙련된 기술이나 명상, 수행과정이 아닌, 가사노동이나 가내수공업 같이 반복된 행동 속의 규칙이나 질서만을 넣기를 고집했다.
그 결과 수 개월 짠 황금 이불이나 사만 오천 개의 수많은 공이 들어간 나무, 수많은 끈이나 비닐로 바닥이나 공간을 덮은 집 작업들이 나오게 되었다. 일상의 시간과 동등한 부피로 시간을 잡는 작업이 절실했고, 어떤 면으로 내가 작업을 계속 할 수 있는 지지대가 되어주었다.
집 : 나는 작업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집의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사용하고 은유했다. 전시 제목에서 집으로 가는 길, 미씽홈(Missing Home), 집이 있던 자리 등 집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어린시절의 기억, 머무는 공간의 기억과 감각을 모두 동원했다. ‘집’ 이라는 궁극적인 곳, 머리를 두는 지향점, 뿌리인 고향, 안락한 낙원, 돌아갈 곳의 죽음 등의 뉘앙스 뿐만 아니라 집이라는 물리적 요소, 공간을 구성하는 사물들, 구조들, 집 짓는 데 사용하는 건설재료까지도 모두 작업 속으로 끌어들어 사용했다.
나에게 ‘집’ 은 그만큼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돌아가고 싶은 장소이자, 내 삶의 모든 구체적인 형상이면서 붙잡을 수 없는 순간이다.
그래서 ‘집’ 은 여전히 작업이고 꿈이고, 내 삶의 구심점이다.
촘촘하게 : 작업의 막바지 기간 중 휩쓴 코로나 19는 집에만 머물게 되는 계기였다. 오래 머문 집안에서의 생활은 지난 내 작업환경을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마침 계절도 같아서 첫번째 전시가 계속 생각났다. 아이를 낳은 직후의 전시일정이라 준비기간내내 지금처럼 집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상상력의 증폭, 바깥으로의 집중력, 그럼에도 생길 수밖에 없는 공백들을 촘촘하게 조율하였다.
동선의 편의에 의해 자연스레 부엌에 조성되는 작업대, 익숙한 집 안의 사물들과 배치방법, 밤시간의 작업량, 생활소리와 가까이 있는 작업과 순간 벗어나는 나의 집중력 등은 끊임없이 발끝으로 서기를 시도했던, 내가 직면한 상황이었다.
황금 : 결혼을 하며 금박이 박힌 한복 치마를 입고, 금반지를 증표로 나눠 가졌다. 아이의 돌이 되면 지인들에게서 순금 돌반지를 받았다. 새로 이사간 아파트는 금색띠를 두른 벽지와 금색 문손잡이로 되어있었다. 시골집을 떠나 서울로 올 때 엄마는 결혼 패물을 모두 처분했다.
세번째 날, 방앗간 집 딸은 그에게 짚을 황금실로 바꾸는 대신 미래의 태어날 아기와 바꿨다.
아이들 돌반지를 판 돈으로 아크릴과 플라스틱공을 샀다. 금박으로 만든 작품 위를 사람들이 걷게 해서 밟히고 긁혀서 사라지게 했다. 행복한 왕자는 몸을 덮고 있던 금조각들을 모두 떼어서 나누어 주었다. 나는 몸에 익숙한 장신구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내가 만든 황금 이불은 황금빛은 띄었으나 여전히 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