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사라짐을 통해 남는 것

이선영(미술평론가)
문래동의 옛 다방 자리였던 지하 공간은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인공적 폐허로, 그 존재 자체가 무상한 시간의 흐름을 증거 한다. 이 스산한 공간에는 우뚝 서서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는 미술작품이 아니라, 공간에 스며들 듯 존재하는 반(反) 기념비적 작품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표시나지 않게 낡은 벽에 붙어있거나 바닥에 깔려 있다. ‘missing home’이라고 붙여진 최성임의 설치 전에는 ‘잃어버리거나 사라진, 그래서 그리운’ 것들이 있다. ‘home’을 상징하는 것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을 법한 하얀 집이다. 좌대 위에 올려놓고 관찰하기에 알맞은 크기의 이 아기자기한 하얀 집들은 설탕으로 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sweet home’의 응집 물처럼 보인다. 작은 문과 창문, 그리고 계단이 있는 하얀 뾰족 지붕은 집에 대한 전형적인 도상의 결집체이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크기는 앉아서 쉴 수 있는 돌덩이 크기라고 작가는 말한다. 작지만 잠시 쉬어가는 삶의 자리를 상징하기에 적절한 규모이다.

그것이 실제의 건축적 스케일로 확대 되었다고 해서 그 근본적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최성임의 작품에서 규모가 커진 집은 투명해 지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양평의 소밥 갤러리에서 열린 ‘은신처’ 전의 ‘집’은 지붕 뼈대만 남은 집에 설탕을 뿌려서 만든 구조물이다. 투명 골판재로 만들어진 지붕에 소복이 쌓인 눈처럼 보이는 설탕가루는 무색무취이다. 구조 아랫부분은 수조에 담긴 설탕 집처럼 사라지고 위만 남았다. 반파된 듯 한 구조지만 그 꼿꼿한 위용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그곳에 서있지만 동시에 떠있는 듯이 보인다. 600x220x150cm 크기의 집은 관객이 들락거릴 수 있는 엄연한 가건물이지만, 아늑한 내부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곳은 전시준비를 위해 소밥 갤러리까지 가기 위한 한겨울 여정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과 다르지 않은 바깥이다. 숨고 싶지만 숨을 수 없는 헐벗은 은신처는 작가가 말하듯 ‘예술가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또한 ‘예술가의 자리’이다.

작업에 몰두하는 삶은 작가를 유령 같은 존재로 만들지만,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산물을 타고서 지상의 삶에 다시 복귀하게 한다.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작가는 현실 세계 속에서 투명 인간이 되곤 하지만, 그 투명성의 강도에 따라 그의 작품 또한 투명하게 빛날 것이다. 문래동의 전시에서 하얀 설탕으로 만든 집은 전시장에 몇 채 비치되어 있으며, 때가 되면 하나씩 수조에 담궈진다. 무너뜨리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아니지만, 사건을 촉발시키는 것은 작가이다. 그러나 사건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시간의 흐름에 맡길 뿐이다. 이렇게 사라진 시간들은 공간화 되어 섬처럼 떠돈다. 각설탕의 접착제로 사용되어 녹지 않고 남아있는 형해는 또 다른 연결 고리로의 탄생을 기다린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작가 스스로가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의 연결고리가 되고자 한다. 오래된 바닥을 비추는 거대한 수조는 마치 캔버스처럼 펼쳐져 있으며, 개념과 물질이 응축된 구조가 해체되는 사건 현장이다.

각설탕을 무수히 쌓아 만든 집은 수조에 담군지 채 30분도 지나기 않아 퍽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침수된 집은 이미 녹아 섬처럼 떠있는 구조물들 주변에 미세한 파장을 일으킨다. 집 맨 꼭대기 뾰족 지붕마저 스러지면, 구조물을 지탱시켜주었던 흰색 글루의 형해만이 남겨진다. 수직으로 쌓아올린 구조물은 납작하게 되어 죽음을 상징하는 수평적 구조로 바뀐다. 설탕 덩어리에 집약되어 있던 에너지는 주변으로 방사되고 무질서도(entropy)는 증가한다. 작가는 스스로 만든 작품을 미지의 큰 곳에 하나 띄울 때의 비장함을 언급한다. 그것은 마치 소원을 빌며 연등을 띄우듯 한, 또는 죽은 이의 뼛가루를 버릴 때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미지의 관객을 향해 작가의 결집된 노력을 던져 놓는 전시라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시간과 공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놓은 그 노력들이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작가는 확신하지 못한다.

자신으로부터 출발은 하였지만,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시공 속으로 흩어져간 그 수많은 작품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일렁여 생긴 작은 흔적만큼의 무엇이라도 남길 수 있는 것일까. 남긴다면 도대체 무엇을 남긴다는 것일까.예술가들에게만 해당될 법한 이 특수한 질문은 사실 인간 전체에 해당된다. 여기에 예술의 보편성이 존재한다. 장소의 특수성에 충실한 최성임의 작품들은 낡은 건축적 구조물과 시간의 흐름을 함께 탄다. 물론 그것들은 관객에게 강한 인상만을 남긴 채, 그것이 놓인 공간보다 더 한시적인 시간 속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바닥에 놓인 대형수조 속에서 녹는 설탕 집은 시간의 해체 과정을 드라마 화 하고 거기에 가속도를 부여한다. 비록 그 집들이 근대 건축에서 말하는 ‘거주하는 기계’는 아닐지라도 그것은 시간을 가속화시키는 장치로 손색없다. 각목이나 각설탕으로 조립한 소박한 구조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은 죽음에 가까운 속도로 질주하는 기계 문명의 과정을 압축 재생한다.

최성임의 작품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속도의 미학’을 거쳐서 ‘소멸의 미학’을 개진했던 폴 비릴리오의 문화비평과도 닿아있다. 그녀의 작품은 사라짐을 통해 남는 것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동안 공간과의 밀착도가 높은 작업을 해왔던 작가는 이 스산한 인공 폐허를 파도소리 울려 퍼지는 미지의 바닷가로 변모시킨다. 그곳은 바닷가나 논밭 길, 전시장이나 작업실이 할 것 없이 똑같이 바깥인 것이다. 밀물과 썰물로서 대변되는 시간의 주기는 모든 것을 모래 위에 그려진 낙서 같은 것으로 만든다. 부드러운 지표면을 살짝 긁어 새긴 기호들은 시간의 파도에 의해서 곧, 그리고 반드시 지워지고 말 것이다. 바닷물에 씻겨 모서리를 둥글린 몽돌처럼 집을 이루는 각들은 입자로 분해될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무너지고 녹아내리는 장면도 극적이지만, 그 이후의 여운이 더 중요하다. 작가는 파도소리 이후에 해안가의 작은 돌들이 재배열되며,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를 놓치지 않는다.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는 영역이 더 중요하다. 몽돌소리에서 영감을 받은 드로잉은,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반향 되는 울림들이 책속에 끼워진 나뭇잎 같은 형상으로 공간화 된다. 그 형태는 또한 설탕집이 녹고 남아 섬처럼 떠도는 형해들과도 유사하다. 형태와 소리를 넘나드는 작품에서 물질과 에너지 간의 호환성은 긴밀하다. 작가는 시간 속에 사라질 궤적들을 가늘고 흐릿한 선으로 소심하게 그려놓았다. 그것은 그려지자마자 지워지는 중인 것 같다. 켜켜이 쌓은 시간의 층이 공간의 입자로 다시금 산산이 흩어질 때 생겨나는 감정은 이중적이다. 거기에는 극도의 쓸쓸함과 공허 이면의 희열과 충만함이 있다. 그것은 삶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할 때, 불현 듯 되돌아오는 삶의 강렬한 모습이다. 여기에서 삶과 죽음은 낮과 밤의 관계와 같다. 눈앞에 보이는 기성의 것만을 인정하려 하는 실증적이고 분석적인 습관은 어느 한 면 만을 물신화하지만, 예술의 본령은 이면에 표면만큼의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에 있다.

예술은 삶을 장식하는 잉여가 아니라, 삶을 위험에 빠지게 할 만큼의 진해진 밀도이다. 그리고 또 다른 생성을 위해 소멸을 향하는 속도이다. 그러나 이 강밀도와 가속도만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밋밋한 일상에 삶의 진면목을 부여해 줄 수 있다.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면 삶은 윤곽과 음영을 부여받을 수 없다. 그것은 추상적 삶을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최성임은 이 삶의, 그리고 예술의 역설에 주목한다. 이 전시를 이루는 주재료이자 상징적 물질인 설탕이라는 재료 자체가 역설적이다. 몇날 며칠을 들여 애써 구축한 것들을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허무주의적 태도는 설탕보다는 고통과 슬픔을 떠올리는 소금과 더 어울릴 듯싶지만, 작가는 삶의 에너지원이 되는 달콤한 재료를 선택했다. 여기에는 부정적인 것마저도 크게 껴안을 수 있는 긍정성이 있다. 사실상, 물질과 에너지의 법칙은 완전한 사멸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사라짐을 꼭 비극과 연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는 사라져야 할 것들이 사라지지 않아서(또는 너무 더디게 사라져) 더 비극적이지 않은가. 역사상 수많은 민중들을 압제 했던 절대 권력은 독재자의 영원불멸에 대한 야욕에 의한 것이었고, 지상에는 그들의 기념비들이 아직도 남아서 관광명소가 되어있다. 설탕 또한 모래나 흙처럼 흩어지면서 원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변하는 과정이다. 유한한 삶 속에서 잠시 형태를 취했다가, 다시 무한 속으로 놓여나는 방식은 삶과 예술의 과정 모두에 해당된다. 인간은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나 때가 되면 다시 새순을 돋는 나목과 다를 바 없다. 예술 또한 영원불멸하지 않다. 실로 사라짐이란 현대 예술의 끈질긴 주제였다. 삶이든 예술이든 변한다는 사실만이 영원하다. 모든 존재에 선험적으로 새겨진 그 한시적이고 변모할 수밖에 운명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미세한 연결망으로 가득한 드로잉들은 그것들이 서로 엮여서 함께 변화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최성임의 설탕 집은 존재보다는 사라짐에 방점을 찍는다. 존재론과 인식론적 차원에서, 있음과 있음을 재현하는 방식은 오랫동안 유력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작품에서 있음은 과정으로 변모하며, 이 불확실한 과정은 재현이 아니라 제시될 뿐이다. 지상에 깊이 뿌리박은 본질, 그것이 만들어내는 안정된 세계상은 액체화된 표면 위를 떠도는 불안정한 것이 되었다. 지상의 안전한 거처로 기대되는 집이라는 대상은 이러한 전환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지상 위에 우뚝 서야 할 집-몸은 자신의 동일성을 잃고 차이적 관계로 와해되며, 정처 없이 표류한다. 그것들은 정지에 가까운 미세한 표류를 보여주지만, 전시장에 울려 퍼지는 파도소리로 인하여 관객의 상상력은 표면의 여행을 떠난다. 반복해서 일어나는 사건 때문에 집을 이루는 심층적 구조는 흉물스러운 표면을 이루는 수많은 교차점으로 변모한다.

부정형 다각형으로 변모한 형해들에서, 집을 유추할 수 있는 형태는 완전히 사라져 있다. 그것들은 사라지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다. 높이 12cm의 얇은 수조는 어떠한 기원이나 뿌리도 부정한다. 거기에는 동일성을 차이로, 현존을 부재로, 고정성을 변화로, 결정성을 불확정성으로 이동시키는 힘이 빠르면서도 느릿하게 작동한다. 최초의 하나에 이어, 또 하나의 집이 차례로 투척될수록 절대성의 기준이 될 하나의 중심은 여러 중심을 가지는 상대적 우주로 이동한다. 최성임의 ‘missing home’전은 액화되는 현실을 극적으로 보여주지만, 그것은 이브 미쇼가 [기체 상태의 예술]에서 개진 한 바, 예술의 기화에 대해서 말한다. 이브 미쇼는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찰수록 예술작품을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문명화된 21세기에 우리는 미학이 승리를 구가하는 시대, 미에 대한 열렬한 경배의 시대, 다시 말해 미에 대한 우상숭배의 시대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 많은 아름다움과 함께 이 미학의 승리는 예술작품 없는 세상 한가운데서 일궈지고 전파되며 소비되고 경축된다. 그는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을수록 예술이 ‘미학적 에테르’로 증발하는 역설에 주목한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움이 마치 기체와도 같이 널리 퍼지고 확산되는 반면, 예술작품은 점점 더 소멸되어간다. 예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증발되고 기체 상태로 바뀐다. 예술의 기화작용은 ‘모든 것과 아무거나가 예술이 될 가능성’ 그리고 아무나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즉 개념미술의 등장으로 가속화되었다. 그것은 ‘예술계’(단토)의 인증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절차가 되었고, 그것이 거부했던 상품화도 극복하지 못했지만, 예술을 예술이게끔 하게 하는 본질 규정의 행위에 타격을 가한 것은 사실이다. 이브 미쇼는 예술의 신성화를 위해 유일하게 존속하는 의례들이 현대인이 어디에서나 미학적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두 가지 형태, 즉 여가활동과 관광의 영역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강조한다. 그는 새로운 것을 유행과 추세, 대중매체와 여가산업이 지배하는 생활의 흐름으로 정리한다.

현대의 많은 작품들이 여행의 산물이며, 관객에게도 작품을 통해 여행을 촉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비록 최성임의 작품처럼, 몽돌해변이나 ‘집으로 가는 길’(첫 개인전 제목) 같은 작은 여행일지라도 말이다. 특히 액자에 담겨 벽에 붙은 사진과 드로잉들은 이 여행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광경을 작은 창에 비추는 역할을 한다. 이브 미쇼는 이러한 사라짐, 또는 대체에 대하여 예술작품은 스스로 작업방식을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표상도, 의미도, 상징도 아니고, 단지 강렬하고 특별한 경험을 낳는 것만을 목표로 하게 된 것이다. 영원히 남을 대 예술이나 대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최성임의 작업은 미묘한 파장을 낳는 사라짐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것은 명확한 대상과 의미부여가 아니라, 실제 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변모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여기저기가 떨어져 나간 오래된 공간 속 거대한 수조는 이러한 변모를 두드러지게 하는 연극의 무대이다. 기성의 산물인 하얀 입방체(각설탕)으로 만들어진 미니멀한 사물은 연극성으로 변모한다. 작가는 이 연극적 무대에서 소멸되는, 또는 흘러가는 현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