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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몸속에는 위아래로 흐르는 길이 있다. 뿌리에서 흡수한 물과 무기질을 줄기와 잎으로 전달하는 물관, 잎이 광합성으로 만든 양분을 어린잎이나 꽃, 뿌리까지 전달하는 체관이 모여 관다발을 이룬다. 관 속을 흐르는 액체가 식물을 자라게 한다. 인간의 몸도 같다. 목구멍과 장기, 핏줄을 통해서 물과 양분이 흐르고, 어린 몸은 마치 식물이 자라듯 위아래로 길어지고 부피를 확장하며 성장한다. 그리고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인간 역시 새로운 생명을 품는다. 양수에 담긴 태아는 탯줄이라는 관을 통해 모체에 들어온 영양을 나누어 받는다. 연결하고 나누고 길러내는 것은 어쩌면 액체의 일이다.
지금 여기 천장에서부터 쏟아져 내린 액체가 하얀 테이블의 한 가운데를 관통한다. 테이블은 이 전시의 중심이자 앞서 있었던 또 다른 전시 <파티 오브 식스>(2024.7.20.-8.3, 서울 시민청 갤러리)와 대구를 이루는 지점이다. 두 전시는 최성임 작가의 네 자녀가 엄마의 예술과 삶을 바라본 이야기를 담은 책 『네 개의 사과와 하얀 테이블』(선드리프레스, 2024)로부터 시작되었다.
책 속에서 드러나듯 테이블은 여섯 사람이 정해진 자리에 앉아 각자의 일을 하는 공간이었다. 아침에는 그곳에 둘러앉아 사과를 나누어 먹었다. 그들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엮이며 여섯 개의 몸으로 자라났다. 전시 <파티 오브 식스>가 온전히 아이들의 시선으로 가족의 밝고 넓은 자리를 활짝 열어낸 전시라면, 본 전시는 온전히 최성임 개인의 자리다. 바깥의 이야기를 닫고 이제 아주 깊은 내면을 펼친다.
 
존재의 증명
최성임의 작업은 아주 작은 유닛에서부터 시작된다. 표면적으로는 아이들을 키우며 어디서든 작업할 수 있도록 구성한 방식이라고 하나, 작품 속에서 작은 유닛을 반복하여 거대한 구조를 이루는 형태는 식물이 생장하는 프랙탈 구조를 연상시키며, 나무와 맨드라미 등 주로 식물을 모티브로 하는 그의 작품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식물의 생장이 생명의 충동에서 비롯된 것처럼, 작가에게 공을 끼워 넣고 실을 자르는 등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작품을 증식시키는 행위는 예술의 충동인 동시에 생의 충동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유닛들을 증식시키고, 마치 벌집처럼 어떤 형태의 공간이든 채워 넣는다. 테이블 위에서 성장한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작가의 예술도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집, 가족, 육아라는 단어 안에 예술의 자리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는 네 아이를 키우며 작업하는 동안 지닌 불안한 감정을 ‘구멍’에 비유했다. 망을 벌려서 공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고 끼워 넣는 것, 무언가를 메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는 일은 존재의 자리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긴장과 강박의 상태로 보인다. 아주 작은 유닛을 수천수만 단위로 증식시켜 커다란 작품을 완성하고 공간을 장악하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으로 있을 곳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발끝으로 서서 1㎝라도 더 길어지기 위해 몸을 꼿꼿이 세우며 간절히 증명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을 테다.
하지만 작가는 이제 그렇게 몸집을 불리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했다. 자아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애타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마침내 이르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공간은 2013년  개인전 <Missing Home> (2013.2.22-3.10, 대안공간 정다방프로젝트) 이 열렸던 좁고 어두운 공간과 닮았다. 당시 전시장 한복판을 차지한 수조 속에는 마치 아이를 품은 뱃속처럼 물이 가득했고 각설탕으로 만든 위태로운 집들이 있었다. 이곳에는 실제 물이 없는 대신 여섯 사람이 나눈 액체가 하얀 테이블 위로 흐른다. 따뜻하고 축축한 근원의 뉘앙스. 그는 집에 돌아왔다.
 
테이블 위의 헤테로토피아
집이란 모두가 만족스러운 유토피아가 아니다. 여러 사람이 몸을 맞대고 공존하는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편히 손발을 뻗으며 자라날 수 없다. 게다가 생활이라는 현실과 일상의 규칙이 지배하는 곳에서 어린아이들이 자라나는 동안 가장 많이 희생하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다. 예술가의 자아가 뿌리내릴 자리는 한없이 좁아서 때때로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6인용 테이블은 가족이 음식을 나누어 먹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자리였지만 동시에 작가에게는 아이들을 돌보며 작업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그는 주어진 6분의 1조각의 테이블을 이용해 예술가의 자아가 뿌리내릴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일상의 사물을 가져와 작품의 재료로 삼고, 매우 일상적인 행위와 생활에서의 수행을 작업의 기초로 삼으며 테이블과 집이라는 공간에 예술가의 뿌리를 내린다. 타인을 위해 해야만 했던 일상의 행위를 뒤집어 자기 언어로 만드는 부단한 시도는, 예술가로서의 나도 여기 있다고 말없이 소리치는 일이기도 했다.
작가의 행위로 테이블 위에서의 평범한 일상이 전복되며, 네 자녀에게 테이블은 최성임이라는 타인을 발견하는 공간이 된다. 한 사람의 또렷한 자아를 목격한 이들에게 이곳은 더이상 일방적인 양육과 돌봄의 공간이 아니다. 그들 역시 주어진 6분의 1조각 안에서 각자의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다. 테이블을 공유하듯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세계를 지닌 이들은 이곳에 여러 층위의 세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6인용 테이블은 일종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다.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는 관념 속의 유토피아도, 손에 잡히는 일상도 아니다. 분명히 현실에 위치하지만 당연하게 여겨지는 질서가 재편되고 모든 것이 위계 없이 존재하는 이질적인 공간을 말한다. 인간 최성임과 엄마와 예술가라는 모순되는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듯, 테이블 위에서 수많은 모순된 세계가 공존한다. 아이와 어른의 세계, 일상과 예술의 세계 어느 하나 우위에 서지 않는다.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확장하는 사이로, 불안과 긴장, 이해와 사랑이 섞여든다. 가족의 테이블에 씌여지는 고정관념은 이곳에 없다.
 
삶이라는 뿌리
“나는 네 아이를 키우며 주로 집에서 작업한다.”는 문장은 최성임 작가에게 있어 발끝으로 서는 것처럼 위태로운 선언이었다. 네 아이를 키우며 작업을 한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의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은 뒤 다시 작업을  시작하고 지금에 이르는 여정은, 먼저 선언부터 내뱉고 그 문장을 향해 거리를 좁혀 다가가며 몸을 가까이 붙이는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장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지금, 초창기에 전시했던 공간과 닮은 이곳은 작가에게 ‘원점’이 된다.
시간을 통과한 작가의 깊은 내면이 여기에 있다. 탄생과 소멸이 반복하는 여성의 몸, 혹은 어린 시절의 집과 같은 곳이다. 공을 끼웠던 흔적이나 실을 자른 단면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듯이 작가의 몸을 통과한 것들 또한 두터운 흔적을 남겼다. 그러한 흔적으로부터 현존을 확인한다. 이제 그것을 재료 삼아 다시 시작할 차례다. 네 아이가 성장하여 곧 집을 떠나게 되면 테이블 위에 작가의 자리가 조금 더 넓어질 테다.
수조에 잔잔하게 담겨있던 물은 이제 이곳에서 생의 충동이 폭발하듯 쏟아진다. 그 액체를 양분 삼아 다시 맨드라미가 피어난다. 생명의 탄생은 언제나 아름다운 동시에 위협적이다. 새로운 탄생이 다른 존재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물은 강렬한 생의 충동을 화합의 에너지로 쓴다. 아래로 자라는 뿌리는 수많은 잔뿌리를 만들며 서로 얽혀 줄기를 지지하고, 위로 자라난 줄기는 나선형으로 잎을 키우며 각자가 있을 자리를 만든다. 곧게 뻗은 직선이 아니라 느리게 둘러가는 나선으로 자라나는 가운데 새로운 것을 품을 자리가 생겨난다.
예술 또한 같다. 빠르고 곧은 직선이 아니라 느린 나선으로 둘러갈수록 작품을 지탱하는 잔뿌리가 더 많이 자라나고 단단하게 엮인다. 테이블 위에서 만나 서로 엮인 타인의 세계 또한 각자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가 된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한 것들이 고유한 결을 이루며 작품으로 탄생한다. 지면 위에 피어나는 예술은 결국 삶이라는 뿌리로부터 시작된다.
                                                                                                                 김지연(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