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눈을 감고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나를, 나의 몸을 상상한다. 몸이란 시작이기도 끝이기도, 하나의 개체이기도 그게 세계의 전부이기도 한 것 같다.
전시 포스터가 걸린 좁은 입구를 지나 건물의 전면이 드러나기도 전에, 먼저 새빨간 그물에 플라스틱 공으로 속을 채워 넣은 촉수 같은 구조물이 스멀스멀 마중 나온다. 그 시작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특별한 장식 없는 건물의 외관을 타고 흐르는 한껏 부푼 붉은 물결을 대면하게 되는데, 그 내부에는 최성임의 세계가 설치 작업으로, 얇은 껍질로, 나의 내장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듯한 소리로 그렇게, 그렇게 내 몸을 파고든다.
최성임의 전시 《눈을 감아도 보이는 툭 툭》의 집이 된 온수공간은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만든 전시공간이다. 원래의 건축물에 크게 손을 대지 않아 가옥의 구조를 유지하는 한편 단순하면서도 나무 냄새가 나는 그 공간은 구조물이자 피부처럼, 집이자 몸으로 작가의 작업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전시에서 나는 감각하는 나이자 전시 자체가 된다. 내 피부를 비롯한 모든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감각하고, 공간의 불투명하고 얇은 피부를 느끼며(〈살갗〉, 〈살갗에 닿기〉), 들려오는 소리를 내부에 새기고(〈살갗에 닿기〉, 〈황금 물결+소리〉) 그들의 일부는 내 몸을 스치며(〈안기〉) 나는 그 위에 앉는다(〈책의 집〉).
전시장에 들어와 계단 하나를 올라 들어서면 〈살갗〉의, 연필 드로잉이 새겨진 트레싱지를 투과한 햇빛이 공간을 채운다. 그가 새긴 얇은 선들이 가지런하게도 그 비늘 같은 필름에 결을 더하는 데, 무심한 나무 벽에서도 반복되는 이 드로잉이 그 선들의 정렬로 끝나지 않는 건, 헤드폰으로 제공되는 날 선 사운드 때문이다. 헤드폰으로 들려오는 이 소리는 트레싱지로 불투명해진 시야와는 대조적으로 날카롭게 몸에 새겨진다. 스윽, 스윽, 쏴악, 쏵, 추웁. 긴 선 하나, 조금씩 짧아지는 선들, 이제 남은 몇 개의 선, 종이를 뜯어내는 소리, 여기서 최성임이 그렸을 행위는 소리가 되어 다시 나에게로 와 나의 몸과 조우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 멀리 행인의 대화, 그가 선을 긋고 있을 때의 시간은 나에게 와서 또 하나의 시간이 된다.
감각 다음의 감각 다음의 감각
전시에서 빨강은 호흡처럼, 초겨울 할머니가 홑청을 뜯어 손질한 솜이불의 한 땀 한 땀처럼 전시공간을 종으로 횡으로 가로지른다. 입구에서부터 붉은 물결로 나를 맞이한 〈아주 오래된 나무〉와 층층이 창마다 마주하는 그 부분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맨드라미가 있는 풍경〉, 〈누워있는 몸〉, 〈가족을 위한 식탁〉의 흐드러진 술들은 선명한 붉음으로 감각의 실 한 올을 잣는다. 거기에 고유의 맥동으로 침투하면서도 장을 구분하는 색채는 〈황금 이불+빛나는 벽〉, 〈가족을 위한 식탁〉의 상판, 〈은은한: 방〉의 금빛과 은빛이다.
이 색채의 직조가 하나의 꼬임이 되어 전시를 구성했다면 이를 가로지르는 다른 한 가닥 실은 귀를 통해 온다. 반복되는 선긋기가 청각으로 현현한 〈살갗에 닿기〉 사운드 작업은 먼저 1층 창과 벽의 드로잉과 함께, 2층의 〈누워있는 몸〉과 함께, 3층의 〈책의 집〉의 한편에 그가 만들어 낸 또 다른 대상들과 함께 반복된다. 〈황금 물결+소리〉는 〈황금 이불+빛나는 벽〉이 자아내는, 벽 아래로 조명을 반사하면서 아득하게 새어 나오는 금빛을 뒤로 하고 청각적인 동시에 추상적인 감각 경험을 만든다.
이 종횡의 감각적 교차에 또 한 번 더해지는 것은 독특한 촉각의 느낌이다. 최성임의 사운드 작업은 이미 촉각적이다. 서걱이는 연필 소리와 황금 와이어타이를 엮어 내는 소리, 구슬을 꿰거나 망에 플라스틱 공을 넣는 소리는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현전하는 대상들이 작가와 함께 지나온 시간을 촉각적인 동시에 공간적인 것으로 체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촉각적이며 공간적인 감각은 창에 더해진 〈살갗〉의 트레싱지 드로잉에서 공간인 동시에 나인, 경험하고 있는 나의 피부를 감싸 안아 이중의 감각 경험을 자아낸다.
연기되는 협화음에서 오는 긴장
이 감각들의 직조가 자아낸 전시의 몸체는 하나의 완결된 분위기로 정리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나의 신체를 긴장시키고 각성시켜 살아있는 경험으로 더하는 무언가가 있다. 앞서 연필 드로잉에서, 단정히 짜인 황금 이불과 일정하게 채워진 PE망에서 보이는 작가 특유의 단정함, 꾸준함을 내재한 수공의 느낌과는 상반되는 자극이 내내 공존한다. 강렬한 붉은 색에서, 마감되지 않은 채로 속내를 드러내는 황금 이불의 끝단에서, 투박한 소리 작업에서 문득 문득 우리를 각성하는 그 자극들이 최성임 작업의 한 수라고 말하면 지나칠까? 완성의 과정에서, 조화의 발치에서 그러나 그렇게 화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직전, 또는 완결을 예정한 길목에서 다시금 예술의 존재와 과정을 확인하게 만드는 순간은 이 거대한 몸과 집의 은유를 그저 편안한 클리셰로 소화하게 두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몸을 돌아보게 하고 돌아서는 몸을 다시 돌려세운다.
관계 맺는 몸에 관하여
이 전시의 제목은 《눈을 감아도 보이는 툭 툭》이다. 일견 눈을 감는다는 행위에서 추상의 과정을 연상시키지만 툭 툭에서 다시 몸으로 내려온다. 작가는 연거푸 줄을 바꿔가며 내려 쓴 제목에서 감각뿐 아니라 우리가 접촉을 만들어 내기 위해 전제되어 있는 거리, 간극을 표현하고자 한 듯하다. 나 아닌 타자를 감각하기 위해서, 접촉의 소리가 만들어 지기 위해서는 그 간극을 좁히는 손을 내밀기, 가서 닿기, 낙하와 같은 행위가 요구된다. 최성임의 작업이 내포하는 행위의 감각성은 이렇게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일구는 것으로 다시 의미를 갖는다. 전시를 구성하는 설치 작업들, 그 작업을 만들어낸 시간의 소리들, 우리가 전시를 보면서 보고, 듣고, 닿아서 만들어지는 경험들은 그 자체로 나와 집, 세계, 나와 비인간이 그려내는 이 경험세계의 관계들을 은유한다. 그리고 그 은유 사이를 노니는 나의 몸은 오랫동안 우리가 믿어 왔듯이 배타적인 시각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원래 몸이 그러하듯 보고, 듣고, 만져 감각하는, 오롯이 하나인 몸으로 다시 선언된다.
에필로그
이 전시의 글을 쓰면서 글의 한계를 생각했다. 글은 한 방향이어서, 선형적이어서 사유를 한 줄기로 펼쳐 누군가에 흘려보낸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온전히 《눈을 감아도 보이는 툭 툭》을, 중첩되는 감각과 날선 긴장을 유발하는 몸의 경험, 병렬한 시간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이 글에서 나는 문단과 문단이 나의 몸이 그곳에서 한 경험처럼, 중첩되기를, 선형적인 하나의 경험이 아니라 겹쳐지고 아로새겨져 날 선 감각으로 다시 그 시간을 재현하기를 바랐다. 그 경험이 글의 내용보다는 내용이 그려내는 호흡으로, 감각의 접촉으로 당신에게 가 닿기를 바라본다.